• 5·10 총선거 최형규 후보 대형 선전물

    |25/09/26


  •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근대적 민주선거는 1948년 5?10 총선거이다. 5?10 총선거는 헌법 제정이라는 특별한 목적을 가진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해 200명의 의원을 선출하였고, 임기는 2년이었다. 완전한 독립정부라는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려는 이 뜻깊은 선거에 48개 정당?사회단체와 무소속으로 모두 948명의 후보자가 출마했다.
    후보자들은 자신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선거운동을 벌였다. 당시 선거법은 선거운동에 특별한 제한을 두지 않았다. 가장 많이 활용된 선거운동 방법은 단연 인쇄홍보물 배포였다. 벽보, 명함, 전단, 팸플릿 등 다양한 크기와 종류의 인쇄물이 선거 현장 곳곳에 흩뿌려졌다. 그중 현재 남아있는 가장 희귀한 홍보물은 선거벽보였다. 벽보는 벽에 부착되어 있다가 선거가 끝난 뒤 넝마주이, 고물장수 등이 모두 떼어 폐지로 활용했기 때문에 남아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여러 난관을 뚫고 8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남은 최형규 후보의 선거벽보를 살펴보자. 먼저 상당한 크기가 눈에 띤다. 가로?세로 길이가 77.0×161.0㎝여서 현존하는 선거벽보 중 가장 크다. 규격 제한이 없었기에 가능했다. 5?10 총선거 이후 제2대 국회의원선거부터는 벽보 규격을 70.0×50.0㎝ 이하로 제한했다.

    다음으로 외관을 살펴보면, 중간에 군데군데 탈락한 부분이 보이고, 하단은 상당 부분 훼손되어 있다. 벽에 부착되어 있던 것을 떼어 내는 과정에서 훼손이 불가피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는 더 이상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별도 종이로 배접되어 있다.
    최형규 후보의 벽보는 직접 쓴 붓글씨로 작성되었다. 용지 견본 부분을 제외하고 벽보 내용은 다음과 같다.(가독의 편의를 위해 현대어 문법으로 바꾸었다.)

    첫 문단은 최형규 후보에 대한 간략한 소개글이다. 오로지 농사에만 힘썼다며 ‘농민후보’임을 앞세우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벼슬을 버렸다는 표현이 있는데, 후보자명부에는 과거 면장 경력이 기재되어 있다.
    이어지는 문단에는 투표 방법이 설명되어 있다. 커다란 용지 견본을 예시로 들며 기호 4번인 최형규 란에 점을 찍어달라고 호소하였다. 점을 찍는 방식이 당시 기표 방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흔히 알고 있는 붓대롱, 탄피 등을 이용해 ○로 기표하는 방식은 1952년 이후 도입되었고, 5?10 총선거 때는 ○, △, ×, ∨, ? 등 투표자가 자유롭게 표시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기표소에 특정 기표용구가 아니라 필기도구가 비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벽보의 작성 날짜인 4월 15일 등이 적혀 있으나 훼손이 심하여 다른 내용은 판독이 쉽지 않다.
    강원 제7선거구(평창)에 출마한 최형규 후보는 4,368표(12.3%)를 득표하며 낙선하였다. 당선자는 20,938표(59.2%)를 획득한 기호 2번의 황호현 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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