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선거의 후퇴 - 3선 개헌

    |18/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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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선거의 역사는 1948년 첫 선거 이래 험난한 여정이었으니, 1969년 또한 3선 개헌으로 온 나라가 정치적 격동의 시간을 보낸 한 해였습니다. 3선 개헌은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대통령의 3선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개정한 사건으로 국회의 의결을 거쳐 1969년 9월 18일 헌법개정안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의해 게시되었습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는 윤보선에 116만 표 차이로 낙승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대통령선거 못지않게 곧 이은 제7대 국회의원선거에도 사력을 다했습니다. 제3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4년으로 하고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었는데, 집권여당은 3선 개헌을 염두에 두고 개헌이 가능한 2/3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노골적인 관권ㆍ금권선거를 자행했습니다.
    정부ㆍ여당은 야당인 신민당 의원 3명을 포섭하여 모두 122명의 개헌 지지선을 확보하고 대한반공연맹, 대한재향군인회 등 50여 개의 사회단체들을 동원하여 개헌지지 성명을 발표하게 하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이에 맞서 신민당은 3선 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열고 개헌반대 투쟁에 나섰습니다. 한편 전국 대학가에서는 장기집권을 막기 위한 개헌반대 시위가 연일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결국 9월 14일 일요일 새벽 2시 국회 본회의장에서 점거농성을 하고 있던 신민회 의원들을 피하여 국회 제3별관에 여당계 의원 122명이 모여 기명투표방식으로 찬성 122, 반대 0표로 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켰습니다.

    [자료1] 1969년 9월 18일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헌법개정안의 게시를 위하여 제작한 벽보. 벽보 상단에는 ‘헌법개정안게시’라는 제목과 국민투표법 제23조 규정에 의하여 1969년 8월 9일에 공고되고, 1969년 9월 14일에 국회의 의결을 거친 헌법개정안을 다음과 같이 게시한다는 내용의 전문(前文)이 있습니다. 본문에는 국회의원 정수의 증원, 국회의원의 각료 겸임, 대통령의 연임을 3기까지로 연장하는 등의 헌법 개정 내용과 헌법은 공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는 내용의 부칙이, 하단에는 게시 연월일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인쇄되어 있습니다.
    [자료2] 1969년 8월 19일 신민당 경북예천지구당에서 3선 개헌 저지투쟁위원회를 결성하면서 작성한 결의문. 3선 개헌을 저지한다는 내용이며 3가지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민주역사에 씻지 못할 반역적 오점인 삼선개헌을 저지함은 우리 군민의 여망이며 7백당원의 사명임에 결사적 항쟁을 각오하여 투쟁한다. ② 우리는 삼선개헌을 저지하기 위하여 향사 내 지도급 인사를 다수 투쟁대열 앞에 영립하여 투쟁력을 강화하며 중앙당의 지시에 따라 범국민적 투쟁대열을 정비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③ 박정권이 영도하는 공화당 중에서도 삼선개헌 저지에 앞장서는 양심적이며 역사적 책임감이 있는 인사가 대다수임을 동시대의 지성인으로서 환영하면서 그들의 건투를 기원한다.

    헌법개정안은 10월 17일 국민투표에서 65.1%의 찬성으로 확정되었고, 박정희는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3선에 성공했습니다.

    ※ 참고문헌
    대한민국역사박물관ㆍ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 민주주의를 키우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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