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국민투표와 대통령직선제 부활
|23/10/27
■ 직선개헌 - 국민이 직접 참여한 날
1987년 10월 27일 제6회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습니다. 국민투표는 직접민주주의의 한 형태로 국가의 중대 사안을 결정하거나, 헌법개정안을 확정하기 위해서 국민에게 직접 그 의사를 가부로 묻는 투표입니다. 국민투표가 우리나라 헌법에서 처음 도입된 것은 1954년 제2차 헌법개정 때이며, 이 국민투표를 관리하기 위해 1962년 10월 12일 처음으로 「국민투표법」(법률 제1166호)이 제정되었습니다. 이때는 국민투표관리위원회가 구성되어 국민투표를 관리했습니다. 이후 1969년 3선 개헌을 앞두고 법을 개정해 선거관리위원회에서 국민투표를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국민투표의 기표방식은 찬성과 반대의 표시가 인쇄되어 있는 투표용지에 ‘O’ 표를 하는 방식입니다. 국민투표에 부쳐진 헌법개정안은 국회의원선거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확정되었습니다.
■ 유난히 뜨거웠던 1987년 6월
1987년 제6회 국민투표는 제9차 헌법개정안의 확정 여부에 대한 찬반 투표였습니다. 그해 1월 서울대 학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4·13 호헌조치가 있었습니다. 6월 9일에는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시위도중 최루탄에 맞아 피격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튿날 전국 22개 주요 도시에서 약 24만 명이 모여 호헌 철폐와 직선제 개헌 민주화를 요구하는 6.10 민주항쟁이 발발하였습니다. 마침내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가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는 ‘6?29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1987년 6?29 선언 이후 헌정 사상 최초로 여야 합의로 마련된 제9차 헌법개정안이 제6차 국민투표를 앞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의해 게시되었다. 6월 민주항쟁으로 이룩한 민주화의 핵심은 공정한 선거에 대한 국민적 요구였습니다. 6월 민주항쟁을 이끈 가장 중요한 구호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었습니다. 바로 이 요구가 제9차 개헌안에 담겼습니다. 이와 함께 제9차 개헌안에는 대통령 5년 단임제, 국회해산권 폐지, 국회 국정감사권 부활, 헌법제판소 신설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습니다. 1948년 헌법이 제정된 이후 총 9차례 개정이 있었지만, 앞선 8차례 개헌은 대부분 집권자의 의도로 정권차원에서 이루어졌으나, 제9차 개헌은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여야 합의로 이루어졌습니다.
■ 민주화로 한걸음을 위한 열망의 한 표
새 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1987년 10월 27일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전국 1만 3,634개 투표구에서 일제히 실시되었습니다. 이번 투표는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의지로 투표개시 20~30분 전부터 투표소 앞은 이미 장사진을 이루었습니다. 오후 1시를 기점으로 투표율이 50.3%를 넘는 등 전국적으로 매우 적극적이면서도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부산진구청은 투표인 명부가 확정된 후 다른 곳으로 이사간 2,966명의 유권자에게 5,992개의 시내버스 토큰(71만 1,840원 어치)을 보내주어 투표에 참가토록 권유하였습니다. 또한 아주 먼곳으로 이사간 152가구 가구주에게 “국민투표에 꼭 참여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내 기권방지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전북 이리시 송학동 제1투표소에서는 송학동 1통 2반 교촌마을 유권자 115명 전원이 27일 오전 7시 20분까지 투표를 완료하는가 하면, 전북 남원에서는 개인택시 운전자 65명이 오전부터 남원시내 23개 투표소에 택시 2~3대씩을 배치하여 거동이 불편한 노약자와 환자들에게 무료로 이동을 도왔습니다. 서울 구로공단 등 근로자들은 수출납품을 위해 이날도 조업을 해야했지만, 시간대별로 조를 짜 투표에 참여하는 열성을 보이는 등 전국 각지에서 온국민이 참여하며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민주의지를 나타내었습니다.
투표는 전국적으로 단 한 건의 사고없이 진행되어 오후 6시를 기해 마감되었으며 강원도 원주시를 시발로 전국 245개 개표소에서 개표가 시작되었습니다.
■ 국민이 찾아온 주권
제6회 국민투표는 총 선거인수 2,561만 9,648명 중 2,002만 8,672명이 투표하여 78.2%의 투표율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투표율은 지난 1986년 제5회 국민투표의 투표율(95.5%)보다 17.3%포인트가 낮고, 역대 국민투표 중 1969년에 실시한 제2회 국민투표(77.1%)를 제외하고는 가장 낮았습니다. 역대 국민투표는 대부분 정권 차원에서 언론이나 행정력을 동원하여 투표율을 높였던 반면에, 제6회 국민투표는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에 기반했기에 투표율이 상대적으로 낮았습니다.
개표 결과 투표자 2,002만 8,672명 중에 총 1,864만 625명이 찬성 표를 던져 과반을 훌쩍 뛰어넘는 93.1%의 높은 찬성율을 기록하였습니다. 역대 국민투표 중 가장 높은 찬성율이었습니다. 제2회 국민투표의 찬성율인 65.1% 보다 28%포인트나 높은 수치였습니다. 지역별로는 최고(서울, 93.7%)와 최저(경남·전북·충북, 92.4%) 찬성율의 차이가 1.3%에 불과할 정도로 고른 찬성율을 보였습니다.
이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를 골자로 한 제9차 헌법이 확정되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민주화와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장기간 이어진 권위주의적 정권이 막을 내리고 민주주의를 향한 힘찬 전진이 시작된 것입니다. 국민투표 사상 가장 높은 찬성률을 기록한 제6회 국민투표는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마지막으로 실시된 국민투표로, 국민의 힘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마련하고 새로운 헌법으로 개정한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