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에 밝혀진 오해 - 구로구을 우편투표함 사건(1987)
|22/01/28
■ 순조로웠던 대통령선거 관리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와 구로구을 우편투표함 사건, 이미 30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누군가의 인생에서는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건의 직접 당사자인 구로구을선거관리위원회 위원과 직원들, 구로구청 농성에 참가했던 시민들, 부정투표의 오명을 뒤집어 써야했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과 직원 모두에게 가슴에 응어리진 안타까운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사건이 발생했던 구로구는 갑·을구선거관리위원회로 구성되어 구로구청 옥탑의 작은 사무실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을구선거관리위원회는 직원이라고 해봤자 과장을 포함해 3명이 전부였습니다. 그래도 대통령선거를 앞둔 분주한 상황에서는 옥탑 사무실이 너무 협소했습니다. 다행히도 구로구청 내 보건소 건물 3층 일부를 을구선거관리위원회 임시 사무실로 사용하면서 숨통이 트였습니다.
대통령선거 관리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관리 매뉴얼대로 착착 진행되었습니다. 부재자 투표용지도 아무런 이상 없이 발송되었고, 부재자 투표함은 가장 용량이 큰 철제 투표함을 사무실 안에 비치하고 봉인을 마쳤습니다. 이제 개표만 무사히 마치면 제13대 대통령선거도 성공리에 끝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구로구을선거구의 개표장은 구로구(현재 금천구) 시흥동 서울시립구로부녀복지관에 있었는데, 선거관리위원회 사무실과 5㎞ 이상 떨어져 있었습니다. 차를 타고 이동해도 도로 사정상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 순식간에 불거진 부정투표함 의혹
문제는 부재자 우편투표함을 이송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불거졌습니다. 선거일 당일인 12월 16일 구로구을선거관리위원회는 개표장을 설비하고 개표사무원에 대한 교육을 준비하기 위해 개표장으로 떠날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개표사무원들이 먹을 야식과 물품을 잔뜩 실은 트럭도 이미 구로구청 앞마당에 대기 중이었습니다. 호송경찰들도 이동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하나 남아있었습니다. 사무실 안에 비치해 두며 하루 2번씩 투입했던 부재자 우편투표함이었습니다. 빈 사무실에 덩그러니 혼자 둘 수 없어 개표장으로 함께 옮겨야 했습니다. 오전에 접수한 우편투표는 모두 투입했고, 오후에 도착할 우편투표는 개표장으로 배달해 주기로 구로우체국과 사전 협의돼 있었습니다. 단단히 봉인한 우편투표함을 트럭에 실기 위해 3층에서 들고 내려왔습니다. 이때가 오전 11시 20분경이었습니다.
통일민주당 추천 위원이 함께 나른 우편투표함이 보건소 1층을 막 지나 트럭에 다다랐습니다. 보건소 1층에는 갑구선거관리위원회의 투표소가 설치되어 투표가 한창이었습니다. 연두색의 커다란 우편투표함이 투표행렬을 가로질러 가자 투표소에 있던 유권자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당연히 부정선거 감시활동을 하던 공정선거감시단원의 눈에도 띄었습니다. 현재 투표가 진행 중인데 무슨 투표함을 벌써 이송하고 있는가? 라며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부정투표함 아니냐? 라며 의문이 의혹으로 번져나가는 건 순식간이었습니다. 투표소에 있던 유권자들이 트럭 주위로 몰려와 우편투표함 이송을 막았습니다.
■ 빼앗긴 우편투표함
사무실에 있던 강실원 사무과장이 상황을 보고 받고 급히 내려왔고, 트럭에 올라가 모인 사람들에게 부재자 우편투표함을 개표장으로 이송하는 중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차량을 둘러싸고 있던 유권자들의 항의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사무과장은 선거법 책자까지 들고 관계 조문을 알려주며 이송의 합법성을 설득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유권자들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부정투표함이라고 외치며 투표함 이송을 제지하였습니다. 결국 군중들은 투표함을 빼앗아 깔고 앉아 버렸습니다. 처음 모여든 유권자는 몇몇에 불과했으나,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수백 명이 되었습니다. 정문에 있던 호송경찰들도 총기를 빼앗길까봐 접근하지 못한 채 수수방관 했습니다.
일부 군중들이 선거관리위원회 사무실로 난입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들은 사무실을 점거하고 캐비넷과 서랍을 마구 열어 서류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캐비넷과 서랍에서 투표용지 뭉치와 인주, 기표용구, 인주가 묻은 장갑을 꺼내왔습니다. 이를 보고 오해한 군중들은 부정선거의 증거라며 고함을 지르며 더욱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실에 있던 위원과 직원들은 흥분한 군중을 제지하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투표용지는 훼손을 대비한 여분이며, 인주가 묻은 장갑은 2개월 전 국민투표 때 사용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흥분한 이들에게는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투표 마감시간이 지나고 주변은 어둠에 휩싸였습니다. 몰려든 군중은 점점 더 늘어나 구로구청 광장을 가득 메웠습니다.
■ 구로구청 점거농성과 진압작전
시간이 지나면서 구청은 시위대에 의해 완전히 점거되었습니다. 시위대는 구로구을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과 사무과장, 관리계장을 구청장실에 잡아두었습니다. 이들은 구청장실에 감금된 상태로 밤을 꼬박 새워야 했습니다. 그 밤은 혹독했습니다. 위원장은 흥분한 일부 시위대에 폭행을 당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당일 밤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이 방문해서 정상적인 투표관리 절차라고 설득하려 했으나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사태수습을 위해 구청으로 들어왔던 구로구청장과 구로경찰서장도 감금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상황은 나아지지 않은 채 새벽을 맞았고 선거도 종료되었습니다.
선거 다음 날 구로구청은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시위대들 사이에서 경찰의 진압이 있을 거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그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졌습니다. 또 다시 밤이 찾아 왔고, 아직 어둑한 새벽 6시 그때 우려하던 경찰의 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4천여 명의 전투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구로구청에 들이닥쳤습니다.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맞섰으나 구청 건물로 쫓겨 들어갔습니다. 1층에서 2층으로, 다시 3층으로 점점 밀려 올라간 시위대는 옥상에서 마지막 농성을 하다 오전 8시경 모두 진압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구로구청이 일부 불에 탔고 1천여 명이 연행되어 그 중 200여 명이 구속되었습니다.
■ 30여 년 만의 진위 검증
농성이 진압된 후 우편투표함은 회수됐지만 부재자신고인명부 등 관련 서류가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구로구을선거관리위원회는 우편투표함을 열지 않고 무효로 처리하였습니다. 개함하지 못한 우편투표함은 당시 모습 그대로 선거관리위원회 수장고에서 보관하였습니다. 하지만 부정투표함 논란이 해소되지 못한 채 87년 민주화 과정의 미스테리로 남아 있었습니다. 2016년 한국정치학회는 87년 민주화 과정을 연구하는 일환으로 선거관리위원회에 구로구을 우편투표함에 대한 진위 검증을 제안했습니다. 객관적이고 공정한 진위검증을 위해서는 학계에서 주관하는 것이 맞을 듯했습니다. 여기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참여하여 과학적인 공신력을 높여주었습니다.
30년 만에 개함한 우편투표함에는 그간의 우려를 불식시키듯 당시 모습 그대로 4,325통의 우편투표가 고스란히 남아있었습니다. 겉면의 봉인지는 시위 당시 훼손되었지만 열쇠로 잠겨 있던 겉뚜껑 안쪽의 안뚜껑과 투입구에는 모두 봉인지가 꼼꼼히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안뚜껑 열쇠에도 봉인이 제대로 되어 있어 부정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결과에서도 조작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부정투표함 논란은 완전히 불식되었습니다. 다만,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 당시 구로구을 우편투표함의 조기 이송이 법규 위반사항은 아니었다 해도 선거과정의 절차적 부분에 소홀히 하여 구로구을 우편투표함 사건의 발단이 된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