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이야기

  • 유권자의 의사를 정확히 담으려는 노력 - 비례대표제

    |19/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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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례성을 높이기 위한 선거제도
    서구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난 후 선거는 정치권력을 둘러싼 경쟁의 기본규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다양한 선거제도가 고안되고 시도되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서로 경쟁하는 후보들 중에서 가장 많이 득표한 사람이 당선되었습니다. 이런 방식을 단순다수대표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단수다수제의 결과가 투표자들의 의사에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세 명 이상의 후보자가 경합해 35%, 33%, 32%를 득표했을 때 가장 많이 받은 35%가 당선되지만, 역으로 그는 65%의 지지를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단순다수제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한 사람을 택하게 되면, 다수가 지지하지 않은 사람을 선출하게 되는 역설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이미 고대 로마에서도 고민할 만큼 오래된 숙제였습니다. 근대 민주정치가 시작된 이후 투표자의 의사가 정확히 반영될 수 있는 선거제도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방안이 탐구되었습니다. 그중 투표자의 선호와 선거 결과가 비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서 비례대표제가 아주 많은 갈래로 진화했습니다. 1910년 영국 하원 보고서에는 당시까지 고안된 비례대표제의 수가 무려 300가지라고 쓰여 있습니다. 300가지나 되는 비례대표제는 더 나은 선거제도를 찾으려는 열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결과입니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우리나라가 채택하고 있는 비례대표제는 정당명부식입니다. 정당이 작성한 후보자 명부에 대해 투표하고, 그 결과 총 득표수의 비례에 따라 정당별 당선자 수를 결정하는 제도입니다. 이 제도를 처음 고안한 사람은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 콩시데랑(V. Considerant)이라고 합니다. 재밌게도 그가 이 제도를 제안한 책 제목이 <선거에 진실을 가져오는 수단에 대하여>입니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에는 선거를 더욱 진실 되게 만들려는 노력이 담겨있는 것이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선거사에서 비례대표제 도입 당시 의석 배분방식은 전혀 비례적이지 않았습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처음으로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습니다. 이때 비례대표제의 이름은 ‘전국구’였습니다. 전체 국회의원 175명 중 1/4인 44명을 전국구로 뽑았지만, 우선 득표율이 5% 미만이거나 지역구 의석을 3석 이상 얻지 못한 정당에게는 배분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제1당의 득표율이 50% 미만인 경우 제1당에 절반을 배분했습니다. 제1당의 득표율이 50% 이상일 때는 각 당의 득표율에 따라 배분했습니다. 즉, 제1당에 의석배분을 최소 절반 이상을 보장하는 이런 방식은 제1당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고 또한 유권자의 의사에 비례한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
    87년 민주화 이후 제9차 개정헌법이 도입되고 나서야 전국구 의석의 제1당 몰아주기 방식은 벗어났습니다. 제14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5석 이상의 지역구 의석을 차지한 정당에게 정당별 지역구 의석수 비율에 따라 전국구를 배분했습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비로소 정당의 유효 득표율에 따라 전국구 의석을 배분하기 시작했습니다.

    ■ 1인 2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전국구라는 명칭을 비례대표로 바꿨습니다. 선거가 끝난 이후 민주노동당은 1인 1표 비례대표제에 대해 위헌법률 심판을 제기했습니다. 이때까지 지역구 후보자에게 투표한 유효표를 정당별로 합산해 이 득표율에 따라 비례대표 의석을 배분했기 때문에 ‘얼굴 모르는 선거’로 지적돼 왔습니다. 유권자는 후보자에 투표하든, 정당에 투표하든 절반의 선택권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1년 7월 19일 헌법재판소는 정당에 대한 투표를 별도로 실시하지 않고 지역구 후보자에게 행해진 투표를 각 정당의 비례대표에 대한 투표로 간주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2002년 제3회 지방선거 비례대표 시ㆍ도의회의원선거에 처음으로 1인 2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습니다. 연두색 투표용지가 하나 더 늘었죠.
    1인 2표제가 시행되자 그동안 비례대표 후보를 내지 않았던 많은 군소정당들이 선거에 참여했습니다. 제16대 국회의원선거에는 8개 정당이 참여했지만, 제17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14개 정당이 비례대표 후보자 명부를 제출했습니다. 공약도 가지각색이어서 정책선거에 대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 국민의 뜻을 찾는 일
    중세 교회에서는 성직자를 선출하기 위해 더 나은 선거제도를 고안하는 일을 ‘신의 뜻’을 찾아내는 과업으로 생각했습니다. 선거 결과가 신의 뜻을 왜곡하지 않고 정확히 일치할 수 있도록 개선해 나가는 일은 시대와 공간을 뛰어 넘는 역사적 과업입니다. 물론 지금은 유권자의 뜻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비례대표제는 유권자 의사를 정확히 반영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다만, 우리나라 초기 비례대표제는 유권자의 투표의사를 왜곡하고, 선거의 민주적 정당성을 심각하게 훼손했습니다. 민주화 이후 비례대표제도는 점차 개선되더니 1인 2표제가 되면서 비로소 단순다수제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군소정당들이 원내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 국회가 유권자의 다양한 요구를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글쓴이: 시흥시선거관리위원회 주무관 이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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