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3월 부활한 지방선거… 다시 시작하는 첫 걸음
|18/03/02
■ 30여 년 만의 지방선거 부활
1952년 최초의 지방의회의원선거가 실시된 이래 1960년까지 3차례 지방선거가 치러졌지만, 5·16군사정변 이후 지방의회가 해산되고 지방자치단체장이 임명제로 전환되면서 지방선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각 후보들이 지방자치제 부활을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지방선거가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1988년 지방자치 관련 법안이 통과되고 여야 협상 끝에 1990년 6월까지 지방의회의원선거, 이듬해 6월까지 지방자치단체장선거를 실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3당 합당으로 정국이 경색되면서 지방선거는 합의한 시간까지 실시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협상을 시작한 여야는 1990년 12월 15일 지방의회의원선거를 1991년 상반기 중에, 지방자치단체장선거는 1992년 상반기 중에 실시하도록 하는 지방자치 법안을 마련했습니다. 5~6월경 선거를 치르기로 여야가 세부 일정을 조율하고 있던 와중에 느닷없이 노태우 정부가 1991년 3월 말 구·시·군의회의원선거를 실시하기로 발표하였습니다. 야당은 정부 발표가 ‘수서 택지 분양 특혜 사건’을 물타기 하려는 수작이라고 반발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지방선거일 공고는 행정부의 고유 권한이었기에 야당은 어쩔 수 없이 선거에 참여하기로 합니다. 대신 선거판을 수서비리 사건 규탄의 장으로 활용하겠다고 잔뜩 별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1991년 3월 구·시·군의회의원선거, 6월 시·도의회의원선거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방자치단체장선거는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이유로 또다시 연기되었습니다.
■ 번갯불에 콩 구은 선거
3월 26일 구·시·군의회의원선거를 치르기로 발표한 날짜는 3월 5일이었습니다. 선거일까지 20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3월 13일까지 후보자등록과 선전벽보, 선거공보를 확정하는 것은 물론 선거인명부 작성과 부재자신고인 명부 사본 교부 신청을 받아야 하는 등 정말 바쁜 일정이었습니다.
후보자나 선거관리위원회나 턱없이 부족한 시간으로 허겁지겁 서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출마 예정자 대부분 선거법을 미처 숙지하지 못한 상태였고, 선거운동원을 확보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선거관리위원회에는 선거절차와 선거운동, 벽보·공보 제작 방법을 묻는 전화가 빗발쳤습니다.
선출해야 하는 의원 수는 4,304명으로 역대 어느 선거와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았고, 등록한 후보자만 1만 명이 넘었습니다. 당시 각 구·시·군선거관리위원회 상근직원이 3~4명 정도에 불과했는데 이들이 감당하기에는 업무량이 너무 많았고, 시간마저 부족했습니다. 읍·면·동 투표구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사전교육은 물론 소집 일정조차 잡기 빠듯했습니다. 당장 투표소, 개표소를 설치할 장소와 투표함을 운반할 차량을 확보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사상 최대의 선거 혼란”이 예상된다는 암울한 보도가 직원들의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 1992년 대권으로 가는 전초전
구·시·군의회의원선거에서 후보자 등록은 정당 당원도 가능했지만 정당 공천을 허용하지 않았고, 대신 선거권자 50~100명의 추천을 받아야 했습니다. 정당의 개입을 막았음에도 각 당은 이미 중앙당을 선거체제로 운영하면서 사실상 선거에 관여했습니다. 정당 공천이 공공연하게 성행했고 당원단합대회를 열어 후보자를 지원하는 등 1992년 대권으로 가는 전초전으로 과열되었습니다. 더욱이 야권에서 정치투쟁의 장으로 선거를 활용하려는 가운데 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운동기간 중 정당의 전국순회집회를 제지하자 자칫 선수와 심판 간의 싸움으로 번질 조짐마저 보였습니다.
구·시·군의회의원선거가 치러진 3개월 뒤 시·도의회의원선거는 더했습니다. 정당의 후보자 추천이 가능했기 때문에 각 당은 적극적으로 선거에 개입했고,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선거 분위기가 과열되기 시작했습니다. 여야는 서로 지역감정을 자극하기 일쑤였습니다. 정당이 중앙의 정치무대를 지방으로 옮겨와 갈등과 대립을 반복하면서 우리 동네의 발전과 봉사에 헌신할 수 있는 내 고장의 참된 일꾼을 뽑는 지방선거의 취지가 무색했습니다.
■ 예상치 못한 수확
선거 일정이 빠듯했지만 선거관리위원회의 절차 사무는 큰 문제없이 착착 진행되었습니다. 사상 최대의 선거 혼란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민주화 이후 5년 동안 국민투표, 대통령선거, 국회의원선거와 함께 크고 작은 재·보궐선거를 치르면서 쌓인 노하우 덕분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노고를 무릅쓰고 몇 날 며칠을 꼬박 새운 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문제는 점점 과열되는 선거 열기였습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전국 단위 선거 최초로 기동단속반을 편성해 선거법 위반행위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했습니다. 최초로 선거법 위반행위 신고센터를 설치해 불법 선거운동에 대한 신고와 제보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선거환경은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유세장에 벌인 노점상마저 슬그머니 자리를 옮길 정도로 소주 한 잔 권하는 사람이 없었고, 읍내의 음식점들이 파리를 날릴 정도로 한산했습니다. 선거운동원들이 떼로 몰려다니는 그런 풍경도 보기 어려웠고 선거운동원을 구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정치권과 후보자들은 선거관리위원회가 공명선거를 내세워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면서 ‘동토(凍土; 얼어 붙은 땅) 선거’라고 볼멘소리를 하였습니다. 그만큼 돈을 못 쓰게 한 선거였고, “이런 선거도 있구나”하는 것을 보여준 깨끗한 선거였다고 호평을 받았습니다.
선거기간 중 집회 개최를 둘러싸고 선거관리위원회와 정당의 힘겨루기가 계속되었지만, 공명선거를 위한 선거관리위원회의 순수한 노력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여론도 점점 선거관리위원회를 지지하였습니다. 한 신문은 사설을 통해 “선관위 권위를 존중하라”며 정치권에 일갈하였습니다. 선거판의 모든 불법과 타락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최고 권위는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나와야 한다면서 이를 존중하지 않는 집단은 지방자치제를 정략적으로 이용한다는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 또 다시 출발한 풀뿌리 민주주의의
30여 년 만에 부활한 지방선거였지만 투표율이 60%를 밑돌았습니다. 국민들이 직접 지역일꾼을 뽑는 중요한 선거임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낮은 투표율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각종 정치적 난관을 뚫고 30년 만에 다시 실시된 지방선거는 지방의회의원만 선출한 반쪽짜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풀뿌리 민주주의의 재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지방자치단체장선거도 법이 정한 시기보다 3년 늦어지긴 했지만 1995년에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통해 실시되었습니다.
(글쓴이 : 대전시선거관리위원회 담당관 박종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