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이야기

  • 줄 투표 현상이 심화된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18/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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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번째로 맞이한 전국동시지방선거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되면서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가 개막되었습니다. 막이 올랐음에도 아직 지방자치는 국민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지방자치를 통한 풀뿌리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장밋빛 청사진은 아직 시민들의 공감대를 그리 얻지 못했죠.
    3년의 시간이 흘러 다시 맞이하게 된 두 번째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지난 경험을 자양분으로 삼아 지방자치가 새로운 궤도에 올라서는 계기가 될지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습니다. 마침 제2회 지방선거부터 지방자치단체장과 의원들의 임기가 원래대로인 4년이 되었습니다. 제자리를 찾게 된 만큼 지방선거가 본래의 취지대로 우리 동네의 일꾼을 뽑는 ‘주민들의 축제’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귀추가 주목되었습니다.

    ■ 여야 정권교체 후 첫 전국 규모 선거
    1998년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제15대 대통령선거를 통해 헌정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평화적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져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새 정부 앞에 놓인 과제는 녹록치 않았습니다. 김대중정부 출범 당시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는 전체 국회 의석 294석 중 79석에 불과했습니다.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한 정부와 여당의 선택은 공동정부, 공동여당의 구성이었습니다. 제15대 대통령선거 직전 자유민주연합과의 정치연합, 이른바 DJP연합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은 정권교체에 성공했습니다. 이때 이뤄진 DJP연합은 호남과 충청의 지역연합이었고, 정권교체 이후에는 공동정부와 공동여당의 구성으로 이어졌습니다.
    개혁적인 김대중정부와 보수적인 자유민주연합의 DJP연합은 ‘모순적 정치연합’이라고 평가되었습니다. 모순적인 정치연합의 틀을 극복할 수 있는 주요한 계기는 선거였습니다. 자체적인 역량으로 정국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선거를 통해 국민적 지지를 획득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정권교체 후 첫 전국 규모 선거인 제2회 지방선거는 앞으로의 정계동향을 가늠할 시금석이 될 중요한 선거였습니다.

    ■ IMF 경제위기 속에 맞이한 선거
    국민의 정부는 1997년 말 대한민국을 위기로 몰아넣은 IMF 경제적 위기를 극복해야 했습니다.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맸습니다. 선거판에도 구조조정 바람이 불었습니다. 고비용 정치구조를 개선하여 돈이 적게 드는 깨끗한 선거를 만들기 위해 지방의회의원 정수가 2/3 수준으로 줄었으며 현수막과 명함형 소형인쇄물을 폐지하고 선거사무원의 규모도 축소되었습니다.
    정부는 모든 역량을 경제 위기 극복에 모으려 했지만 정치권은 격랑으로 소용돌이쳤습니다.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명예총재가 국무총리로 지명된 순간부터 총리 임명동의안을 둘러싸고 여?야 대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여?야의 힘겨루기가 계속되던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여소야대 정국에서 1998년 6월 4일 제2회 지방선거가 예정되었습니다.

    ■ 공동정부의 연합공천과 지역주의
    제2회 지방선거를 두 달쯤 앞두고 치러진 4곳의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는 한나라당 후보자들이 모두 당선되어 야당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절치부심한 공동여당은 정권교체를 발판 삼아 ‘대어급’ 후보 발굴에 속도를 냈습니다. 전당대회로 당 체제 정비를 끝낸 한나라당도 물러설 수 없는 일전을 위해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에 지난 대통령선거 직전 이인제 후보를 중심으로 결성된 국민신당도 사활을 걸고 유력 후보 찾기에 나섰습니다.
    공동여당은 16곳의 시?도지사 후보 공천권을 반분하기로 합의하고 새정치국민회의는 서울, 호남, 부산, 경남, 제주에서, 자유민주연합은 인천, 충청, 대구, 경북, 강원에서 공천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선거에서는 후보자 선출을 두고 팽팽하게 맞선 채 진통을 거듭하다가 결국 연합공천이 실패하여 각각 후보를 선정해 ‘여권끼리’ 대결하는 상황도 벌어졌습니다. 그나마 영남지역에서는 마땅한 후보를 구하지도 못한 곳이 많았습니다.
    한나라당은 이른바 동강서약(東强西弱) 현상으로 서울, 경기와 부산에서는 인물 풍년으로 후보간 치열한 경합 때문에 교통정리가 필요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공천이 어려워 결국 호남과 대전에서는 시?도지사 후보자를 공천하지 못했습니다. 국민신당은 최소한 시?도지사 한 곳을 차지하기 위해 골몰했으나 부산과 경남을 제외하고는 경쟁력 있는 후보자를 확보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전반적인 각 당의 공천상황은 제1회 지방선거에서 나타난 지역주의의 바람이 여전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보여줬습니다. 이후 선거결과도 영남과 강원도는 한나라당이, 충청도는 자유민주연합, 호남과 수도권에서는 새정치국민회의가 압승을 거두어 ‘3자 분할구도’가 재현되었습니다.

    ■ 38년 만의 가장 낮은 투표율에 줄투표까지
    제2회 지방선거는 52.7%로 당시까지 선거 중 가장 낮은 투표율을 기록했습니다. 마치 그러리라 예상한 것처럼 방송사 또한 무성의한 개표방송을 편성했습니다. 특히 한 방송사는 개표방송 대신 1998 프랑스월드컵축구 대표팀의 중국과 평가전을 생중계할 정도였습니다.
    선거일이 징검다리 연휴 첫날이었고, 경제난이 심각해 정치보다는 경제에 관심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거기간 중 컴퓨터 통신망 하이텔에서 ‘기권을 통한 정치적 의사표현론’이 제기되어 논쟁이 벌어질 정도로 정치적 허무주의가 심각했습니다. 1995년 주민들이 직접 뽑은 제1회 지방선거 이후에도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낮은 기대치와 정치에 대한 환멸이 확산되었기 때문이죠. 단독후보나 무투표로 당선된 후보자가 758개 선거구에 이를 만큼 지역주의가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선자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데 선거를 해봐야 뭐하나”라는 자조 섞인 푸념이 팽배했습니다.


    또 고비용 정치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선거법이 개정되었지만, 정작 현수막과 명함이 사라져 지명도 높은 단체장을 빼고는 후보들의 면면을 알기 어려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후보자가 많은 지방선거였기 때문에 대도시의 경우 투표소에 들어갈 때까지 후보자 이름을 모르는 유권자가 많았습니다.
    결국 ‘헤일로 효과’라고도 하는 줄투표(일렬투표) 현상이 제1회 지방선거 때보다 더 심해졌습니다. 자치구?시?군의회의원선거를 제외하고는 각 선거별 후보자가 정당별 기호 순으로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유권자들이 첫 투표용지에 기표한 순번대로 다른 투표용지에도 ‘따지지도 묻지도 않고’ 그대로 기표했던 것이죠. 그 결과 전국 16개 시·도 전부에서 ‘1당 지배체제’라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다만, 선거에 대한 관심이 워낙 낮다보니 과거보다 금권·관권 시비가 크게 줄었습니다. 대규모 바람몰이 유세와 북풍, 색깔시비도 사라졌습니다. 심지어 선거 막판 공천과정의 돈 시비가 불거지기도 했지만 유권자들은 관심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38년만의 가장 낮은 투표율’, ‘지역분할 구도의 심화’ 등 좋지 않은 기록을 남긴 제2회 지방선거는 민주화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치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선거였습니다.

    <글쓴이 : 화순군선거관리위원회 지도주임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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