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이야기

  • 풀뿌리 민주주의 지방선거의 시작

    |18/01/12

  • ■ 최초의 지방선거(1952. 4. 25.)


    선거일

    인구수

    선거인수

    투표자수

    투표율(%)

    시의회의원선거

    1952.4.25(금)

    2,668,745

    1,111,849

    891,728

    80.2

    읍의회의원선거

    1,750,102

    734,538

    649,544

    88.4

    면의회의원선거

    13,464,032

    5,689,917

    5,295,462

    93.1

    도의회의원선거

    1952.5.10(토)

    14,836,791

    6,358,383

    5,165,226

    81.2


    ■ 갑자기 실시된 최초의 지방선거
    지방자치는 헌법에 규정된 권리로 1949년 7월 4일 「지방자치법」 이 제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행정체계도 아직 정비되지 못했고, 치안도 불안하다며 1950년 말까지 선거를 연기했습니다. 이마저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언제 시행될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전쟁의 포연이 가시지 않았던 1951년 10월 갑자기 정부는 지방선거를 준비하겠다고 발표합니다.
    이승만 정부가 그동안 온갖 이유를 들어 미뤄왔던 지방선거를 이때 갑자기 실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 직면한 정치적 위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 직전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중도파를 비롯한 다양한 세력이 국회에 입성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입지가 줄어들었기 때문이죠. 여기에 전쟁 중 정부의 실정이 거듭되면서 국회와 정부의 갈등이 점점 심각해졌고, 아예 국회에서는 내각책임제로 개헌을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준비하는 한편, 자신을 지원할 정치세력을 규합하려 했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1951년 자유당이 창당됐죠.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국회에 맞서 이승만 대통령의 정책을 민의로 포장해줄 전국적인 기관이 필요했습니다. 지방의회를 만들어 직통으로 민의를 확인해 보자며 지방선거를 제안한 것입니다. 1952년 2월 마침내 정부는 지방선거를 4월 25일에 실시하기로 공고했습니다.

    ■ 이승만 지지자들의 대거 출마
    1952년 치러진 최초의 지방선거는 전쟁의 영향으로 서울과 강원도, 경기도 일부, 빨치산이 활동하던 지리산 주변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치러졌습니다. 출마자들은 대부분 이승만 대통령 지지자들이었습니다. 이는 시·읍·면의회의원선거의 정당별 출마자 수를 보도한 당시 「동아일보」 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유당 6,500여 명, 대한청년회 5,700여 명, 국민회 5,600여 명 등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하는 정당과 단체 소속이 출마자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야당인 민주국민당 소속은 200여 명으로 0.7%에 불과하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 달라진 선거환경과 예상된 결과
    지방선거와 관련된 모든 절차는 「국회의원선거법」을 준용했고 선거관리 역시 국회의원선거를 관리했던 중앙선거위원회에서 담당했습니다. 지방선거 자체가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목적에서 시작되었던 만큼 그 결과 또한 정권의 의도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에 행정당국의 개입이 광범위하게 자행됐습니다. UN한국통일부흥위원단은 “당국의 차별대우와 압력은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달라졌고, 이 때문에 후보자들이 대거 사퇴하는 등 공정한 선거경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UN총회에 보고하여 우리나라 선거의 부끄러운 민낯이 전 세계에 공개됐습니다.
    선거 결과는 예상대로 이승만 대통령 지지 세력이 압승했습니다. 도의회의 경우 자유당이 전체 의석의 48%를 가져갔고, 국민회와 대한청년회 등을 더하면 그 비율이 70%를 넘었습니다. 야당인 민주국민당은 4석에 불과했습니다. 시·읍·면의회에서도 자유당을 비롯한 친이승만 세력이 60%에 달했고, 민주국민당은 0.2%도 되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지방의회가 모두 친정부 성향의 인사들로 구성되게 된 것입니다. 이 선거에서 당선된 지방의회 의원들은 ‘부산정치파동’ 때 국회 해산을 요구하는 등 여소야대 국회를 압박하는 활동을 합니다.

    ■ 지방자치제도의 밑거름이 된 지방선거
    1952년 실시된 지방선거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바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시행한 최초의 지방선거였다는 점입니다. 지방선거와 지방자치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던지 당시 신문지상에서는 5·10총선거를 ‘민주주의의 초석’으로, 이번 지방선거를 ‘민주주의의 기둥’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현재까지도 지방선거는 지방자치의 출발점이자 ‘풀뿌리 민주주의’의 산실로 여겨집니다. 정권의 이해관계가 얽혀있었다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초석을 다지는 역사적 기원이 된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치적 필요에 따라 갑자기 시작된 지방선거였기에 정치적 상황에 따라 변화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승만 정부에서 「지방자치법」 은 몇 차례 중대한 개정을 거쳤습니다. 한때 서울시장과 도지사를 제외한 모든 지방자치단체장을 주민들이 직접 선거하기도 했고, 다시 모두 임명제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지방에서 선거를 관리하는 지방행정조직을 장악하느냐 못하느냐가 지방선거뿐 아니라 대통령선거나 국회의원선거의 승패까지 좌우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승만 정부에서 지방선거는 1956년 한 차례 더 실시됐고, 제2공화국이 들어선 1960년에 전국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의원선거가 시행됐으나 5·16 쿠데타 이후 30년간 지방자치는 사실상 중지됐습니다. 이후 1991년 지방의회의원선거가 다시 실시됐고, 1995년에는 지방자치단체장선거가 시행되면서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가 열리게 됐습니다.

    (글쓴이 : 선거기록보존소 전문경력관 최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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